★ 캐나다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Christopher Plummer)가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코네티컷의 자택에서 아내가 보는 앞에서 평화롭게 임종했다.
한때 오스카상을 받지못한 가장 위대한 배우로 불렸던 그는, 80세가 넘어가면서 연거퍼 후보에 오르더니, 결국 82세에 남우조연상을 가지고 갔다. 그에게 최고령 아카데미상 수상자란 명예를 준 영화는 '비기너'이고,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아내가 죽은 뒤 게이로 커밍아웃하고 살아가는 노인 역을 연기했다.
★ 배우로서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풍부한 목소리와 연극무대에서 잘 단련된 우아한 동작이다. 대사에 나오는 모든 단어는 물론이고, 쉼표와 새미콜론조차 구분해서 발음하는 듯한 그의 정확한 발성은 늘 환상적이었다. 그가 나오는 순간, 영화와 드라마는 갑자기 연극 무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우스개소리로, 그가 캐나다 사람이어서 손해가 막심하다고 했다. 무슨 소리인가?
만약 그가 영국인이었다면 진작에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을 것이고,
만약 그가 미국인이었다면 진작에 오스카상을 쓸어갔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캐나다의 3번째 총리였다.
그는 캐나다의 퀘벡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전 세계로 활동범위를 넓힌 이후에도, 늘 고향을 사랑했다.
그는 캐나다 국적을 끝까지 유지했고, 일이 없을 때에는 주로 캐나다의 집에서 살았다.
★ 사운드 오브 뮤직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방영된 TV영화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은 '사운드 오브 뮤직'.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이 히트작에 대해 양면적인 대응을 했다.
젊어서는 이 영화로만 기억되는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거로 보인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콧물의 소리(Sound of Mucus)라고 조롱했고, 함께 연기했던 줄리 앤드루스에 대해서도 불평했다.
그는 브로드웨이와 영국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메인 연기자였기에, 대중이 자신을 히트 뮤지컬 영화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이 자신의 히트작과 화해했다.
그는 이 영화의 자신을 기억하며 다가오는 대중의 관심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뒷담화, 아니 앞담화로 괴롭히던 줄리 앤드루스와 만나서 화해했고, 다정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친구가 되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그의 자식 역할을 맡았던 배우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 정도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들을 대신해 영화의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사람들의 추억을 달래주었다.
그는 나이들어 쓴 자서전에서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따뜻하고 감동적이며, 즐겁고, 절대적으로 시대를 초월한 영화이다.
★ 200편이 넘어가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젊은 시절은 충분히 화려하지만, 노년은 특별하다.
60세가 넘어가는 시점부터 그는 인상적인 조연들을 연기한다.
당대 최고의 젊은 배우들의 주변에서 영화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잭 니콜슨이나 로버트 드 니로가 그런 것처럼 상대하는 젊은 배우들을 압도하거나,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영화 '예외'에서 함께 작업한 배우 에디 마산은 이렇게 말했다.
마스터 클래스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더이상 증명할 것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롭고, 친절하고, 재미있고, 장난스럽고, 아름다웠다.
★ 인상적인 작품들
마이클 만의 '인사이더'는 알 파치노와 러셀 크로우가 공동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다.
두 배우가 영화 포스터를 차지하고 자신들을 뽐낼 때,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앵커 역할을 맡아 조용히 협연한다.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연기하는 왈라스 앵커는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노련한 유명방송인이다.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유명인의 심리를 잘 보여줬다.
그저 알 파치노와 방송국 복도에서 대화하는 것 뿐인데도, 긴장과 갈등은 총격씬처럼 강렬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 톤이 완전히 다른 것도 갈등의 느낌을 증폭시켰던 것 같다.
알 파치노는 갈라지고 탁한 소리이고,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맑고 부드러우며 정확하다.
그는 역사 속 실존인물을 연기하는 것도 자주 했다.
그런데 이 인물들이 이만저만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다.
무려 아리스토텔레스와 톨스토이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인류사에 영원히 남는 위인들을 연기하며, 그들에게 생생한 육체를 주었다.
★ 영화 '알렉산더'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업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왕자가 학생인 수업인데, 단독수업이 아닌 것이 가장 특이했다.
알렉산더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스승의 수업을 듣는다.
수업을 함께 듣던 이 친구들이 나중에 그 먼 정복여정을 함께 떠난다.
수업하는 장소도 왕궁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돌산의 전망좋은 바위 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준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적인 의미에선 자연과학에 가까운 연구도 했던 사람이란 점에서 적절하다.
역사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정을 떠나는 황제에게 특별한 요청을 한다.
원정 기간 동안 새롭게 만나는 동물과 식물을 마케도니아로 보내달라는 요청이다.
알렉산더는 원정 기간 내내, 채집과 보고서를 작성해서 스승에게 보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저술은 이런 식으로 황제의 후원 아래 쓰여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생각을 계보화하고, 귀납적인 사고로 진실에 도달하기위해 방대한 자료를 원했던 철학자.
서양철학사의 거인을 이 캐나다 배우는 놀랍게 재현했다.
★ 악당
리들리 스콧은 2016년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촬영이 끝나 편집을 하고 있던 영화를 엎어야될 일이 생긴 것이다.
영화에 나온 케빈 스페이시 때문이었다.
케빈 스페이시는 여러 건의 성추행으로 고발되었고, 그는 혐의를 인정하고 배우에서 은퇴했다.
리들리 스콧은 완성된 영화를 다시 촬영해야 했다.
리들리 스콧은 케빈 스페이시를 대신할 배우로 크리스토퍼 플러머를 캐스팅했다.
굉장히 급하고 즉흥적인 작업에 임해서도, 노배우는 자유롭고 강렬했다.
그는 거대한 부를 이룬 사람의 뒤틀린 인격을 압도적으로 보여줬다.
사실 크리스토퍼 클러머는 영화 이력 내내 인상적인 악당을 자주 연기했다.
간단치않은 배경을 가진 복잡한 심리를 가진 악당들이 그에게 잘 맞았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를 스타트렉의 악당으로도 기억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지않아서 뭐라 첨언할 것이 없다.
안 본 작품들 중에 궁금한 악당은 또 있다.
드라마 '우리 신부님'이다.
카톨릭 신부들의 성추행 스캔들을 다루는 드라마인데, 여기서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추기경 역을 한다.
포스터를 보면, 마치 악당의 끝판왕 같은 느낌이다.
그의 조상 중에 캐나다 성공회 성직자가 있다는 게 생각나서 흥미로웠다.
★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70년 동안 무대와 스크린, TV에서 200편이 넘는 작품을 한 대배우이다.
그가 출연한 첫번째 영화는 1958년에 시드니 루멧이 만든 '스테이지 스트럭'.
시골 아가씨가 배우가 되기 위해 뉴욕 브로드웨이로 와서 겪는 이야기라고 한다.
★ 마지막으론 그의 오스카 수상 소감을 적어본다.그가 82세 때의 일이다.
(오스카상을 향하여) 너는 나보다 겨우 2살 더 많지, 달링. 너는 내 인생 내내 어디에 있었던거냐?
(청중들에게) 고백 할 게 있어요. 어머니의 자궁에서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이미 아카데미 수상연설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이라 까먹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지는 잊지 않았죠.
우선 아카데미 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동료 후보자들.
Kenneth, Nick, Jonah, 친애하는 Max.
당신들과 함께 있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Michael Mills와 그의 매혹적인 영화 "Beginners"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스크린 파트너였던 Ewan McGregor는 제가 예의를 갖춘다면, 이 상을 기꺼이 함께 나눠야할 훌륭한 아티스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진 않겠습니다.
Olympus Films의 모든 제작자, 특히 Leslie Urdang과 Miranda de Pencier.
Focus의 모든 사람들이 보내준 엄청난 관대함과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Lou Pitt와 그의 아내 Berta, Carter Cohn, Pippa Markham, Perry Zimel은 나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항상 나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내 딸 아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삶의 매일을 구해 주러 오는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내심있는 나의 아내, 일레인.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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