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드라마를 학교로 치면, <풍운전국> 7부작은 심화학습 반이다.
서기전 중국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이 많을 것이다.
중국 역사학계의 최신 연구가 녹아있고, 다큐임에도 재연배우들의 라인업이 너무나 훌륭해서 몰입하게 된다.
한 편에 하나의 국가를 다루면서, 언제나 2가지 핵심문제를 묻는다. 그 질문은 이것이다.
1. 어떤 나라인가? 2. 왜 망했는가?
<개요>
풍운전국 6화 제나라
- 기원전 10세기에 강태공이 건국.
- 수도 임치의 주민 중 1/3이 상업에 종사했던 부유한 국가.
- FIFA가 인정한 축구의 발생지.
- 투계, 도박, 공창제를 즐긴 나라.
- 음악이 동시대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 공자가 제나라 음악을 듣고 끼니를 잊었다고 말할 정도.
- 고대의 유명 병법서들이 우르르 쏟아진 나라.
-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한 동쪽의 강국. 하지만!
- 말기엔 왕이 재상에게 살해당한다. 재상은 왕의 다리 힘줄을 끊어 그 힘줄로 왕의 목을 매달아 죽였다.
<감상>
1> 풍운전국 시리즈는 모든 편이 오프닝이 강력하다.
주로 망국과 관련된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고, 이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물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탁월하다. 풍운전국이 흥미로운 건, 시간순으로 지루하게 늘어놓지 않고, 역사의 고금을 자유롭게 오가며 이유를 찾는다.
또한 자주 이 나라에 나왔던 인물이 다른 편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이것이 한 가지 사건, 인물을 다른 시야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6화는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제민왕이 오프닝에 나온다.
그는 가마를 타고 궁으로 가면서 하인들을 재촉한다.
"빨리 좀 가자! 고기가 먹고싶단 말이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재상의 배신.
재상은 군사를 불러 왕을 포박하고, 죄를 묻는다.
그런데 여기서 이 암군의 관심은 고기에 있다.
"고기부터 좀 먹자."
민왕을 연기하는 배우가 놀라운데, 그는 곤궁에 몰려서도 눈 앞의 식탐에 지배당하는 어리석음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의 연기 덕분에 이 짧은 장면은 순식간에 셰익스피어의 사극에 나오는 왕들의 비극과 같아진다.
재상이 나라에 혈우가 가득하다면서 왕을 비난하자, 왕이 받아친다.
"내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치자. 그럼 재상인 너는 무얼 했느냐?"
민왕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는 자신을 벌하러 온 자들에게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후회하지도, 용서를 빌지도 않는다.
당당하게 고기를 달라고 할 뿐.
그리고 6화의 마지막. 민왕은 피투성이가 되어 대들보애 매달려있고, 잘린 살에서 흘러내린 피가 웅덩이를 이루어 흐른다.
그 피웅덩이 속에 민왕이 먹으려던 고기가 떨어져있다. 그리고 텅빈 왕궁에 검은 개 한 마리가 들어온다.
고기의 냄새를 맡더니 먹지않고 다시 사라진다.
무시무시한 연출이었다.
배우의 연기도 탁월했다.
2> 직하학궁(稷下學宮)
상업적으로 부유한 제나라는 왕실 후원의 학교를 세우고, 천하의 학자들을 널리 구했다.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토론, 학습을 통해 놀라운 업적을 냈다.
맹자도 이 학교에서 강의, 학습하며 왕을 만나 대화했다.
드라마엔 맹자가 제선왕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선왕은 상당한 미남으로 약간 턱을 치켜들고 있어 자부심이 느겨진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지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있다.
이런 연기가 연출자와 배우가 고전 공부를 충실히 한 흔적이다.
반면 맹자는 깡말랐고 약간 신경질적으로 생긴 노인이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는데, 맹자는 차를 마실 때, 긴 소매로 입을 가린다.
(다른 나라 편에서는 못 본 행동 같은데, 나중에 확인해야겠다.)
제선왕 : 선생. (부끄러워하며) 나는 돈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리고 노는 것도 좋아해서 음악도 오래된 것보단 유행가만 듣죠.
또 여색도 무척 좋아해서 끊을 수가 없어요. 왕이 이래도 괜찮습니까?
맹자는 당황한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위해 차를 한잔 마신다.
그리고 답한다.
맹자 : 전혀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왕께서 그런 것처럼, 백성들도 돈과 여색을 좋아합니다.
그걸 알고 백성들과 함께 즐기려고 하시면 됩니다.
맹자의 말을 들은 제선왕은 호탕하게 웃는다.
그리고 손을 모아 맹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맹자 <양혜왕>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학교에선 이 구절을 가르치면서 <여민동락> <왕도정치> 같은 개념을 말한다.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눈다.
교실에서 맹자를 배울 때 <여민동락>은 어딘가 점잔빼는 느낌으로 도지사 선거 포스터 같은 데 나올 법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서야 생생하게 알겠다.
맹자는 왕의 기분을 맞춰주면서도, 경고를 한 것이다.
너만 돈과 섹스를 좋아하는 게 아냐. 같이 즐겨. 이 놈아.
사실 이런 뜻이 된다.
최고 권력자와 학자의 대화가 이 정도라면 훌륭하다.
여기엔 전국시대 특유의 솔직함과 실용적인 생각이 들어있다.
이토록 찬란했던 직하학궁의 역사이지만, 그 최후는 끔찍하다.
제나라 말기. 군왕후라는 여인이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녀는 왕인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을 왕으로 세운 뒤, 섭정한다.
그녀는 나라를 망국으로 이끄는 여러 결정들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직하학궁을 타락시킨 것.
그녀는 합리적인 학자를 내쫓고, 장생과 신비를 이야기하는 도교의 선인들과 사이비 도인들을 잔뜩 끌여들였다.
제나라는 예로부터 노자의 후손들이 살았고, 그 영향력이 크긴 했다.
하지만 군왕후는 나라의 막강한 재정에 기대어, 서쪽에서 몰려오는 중원통일의 전운 속에서도 부전, 평화의 논리에 심취했다. 싸우지 않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따위의 헛된 말을 쏟아내는 도인들의 말에 기뻐했다.
그녀는 전쟁에 열중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만끽하며 망국의 길로 달려간다.
드라마엔 군왕후가 직하학궁에 입장하면, 점잖은 흰 옷을 입은 도인이 맞이한다.
군왕후가 인사말로 싸우지않음이 이기는 것, 평화야말로 소중한 것이란 이야기에 감명받았다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데, 도인이 왕후의 뒤에서 손을 부채질하며 박수를 더 크게 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흰 장막 너머로 도인들의 강의를 듣는 권력자 군왕후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직하학궁의 마지막 장면이 끝난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 나라의 베스트셀러 목록이 결국 그 나라의 정신이란 생각이 들었다.
3> 다른 나라의 기록에 제나라 병사들은 도망 잘 치기로 유명했다.
제나라 병사들의 갑옷과 병장기는 전국 시대 최고 수준으로, 초호화 장비였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도망치기에 바빴다고 한다.
군왕후같은 지도자의 어설픈 평화의 메세지는 제나라 군대를 근원적으로 타락시켰고,
위기의 순간이 닥쳤을 때, 제나라는 그 막강한 경제력과 문화수준에도 불구하고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도를 보면, 제나라는 중국의 동쪽.
산동반도에 몰려있다.
그들은 중원에서 상대적으로 멀었고, 그 지리적 거리감이 정세판단에 나쁜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들은 상업활동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으론 고립주의의 길을 간 듯.
하지만 중간에 송나라를 멸망시키는 전쟁도 벌였으니, 더 공부가 필요하다.
근대에 와서도 산동은 상인들로 유명하고, 거상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 사람들은 참 돈을 좋아한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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