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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Movie

견자단의 엽문 4ㅣ영춘권 마스터의 실제 인생은 어땠을까?

by 헤로도토스의 별 2021. 1. 25.

★ 엽문 시리즈는 지난 11년 동안 정기적으로 찾아와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처음 1편에서 유도하는 일본애들을 줘패는 씬은 정말 강렬했다.

맞는 애들이 불쌍하다 싶을 정도로 타격감이 살벌했다.

 

저런 살벌한 스타일의 액션이 처음 나온 건 토니 자의 옹박(2004)이었다.

이 불세출의 태국 무술가는 헐리우드와 중국의 액션 연기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중국 무술가들의 대응은 신속했다.

옹박이 나온지 1년 후에, 견자단은 엽위신 감독과 팀을 이루어 토니 자에게 대답했다.

엽위신 감독이 바로 엽문의 감독이다.

'살파랑'(2005)에서 견자단과 오경은 작심하고 맞는 연기를 자청했고, 근사한 장면을 만들었다. 

 

엽위신 감독과 견자단은 그후 '도화선'(2008) '엽문'(2009)으로 작업을 확장했다.

그런데 새삼 이 영화들을 돌이켜 생각하니 액션도 액션이지만, 줄거리를 참 잘 짠다는 생각이 든다.

 

1편도 저 살벌 잔인한 주먹질까지 가기위해 스토리를 참 잘 짰다.

피가 묻은 쌀자루.

밥을 먹기위해 일본군과 대련에 나갔다가 맞아 죽는 동료 무술인을 보고서야, 엽문은 나선다.

 

4편은 전체적으로 액션이 침착한 느낌인데, 엽문이 늙었을 때를 다루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액션 장면은 중추절 차이나타운 행사 씬이다.

미군 해병대 장교의 깽판으로 중국 무술가 사부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진다.

참고 또 참던 엽문.

하지만 사부 중 여자사부가 한명 있었고, 그녀가 얻어맞기 시작하자, 무대로 튀어오른다.

 

영춘권의 유래
이 장면은 영춘권의 유래를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영춘권은 유래가 특이하다.

창시자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영춘권의 창시자는 엄영춘. 

청나라 말기, 영춘은 아버지와 함께 광서 대량산에서 두부장사를 하고 살았다.

소림사의 비구니 스님 겸 무술가 오매대사가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무술을 가르쳤다.

영춘은 그후 뱀과 학이 싸우는 걸 보고 무술에 큰 영감을 얻어 권법을 완성한다.

그녀는 스승인 오매 대사에게 자신의 권법에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오매대사는 심플하시다.

니 이름으로 하자.

 

이렇게 시작한 영춘권은 첫번째 제자도 특이하다.

엄영춘의 남편, 양박주이다.

영춘은 결혼 후에 남편에게 최초로 무술을 전수하고, 첫번째 제자로 삼는다.

영춘권의 독특함은 이 다음에도 이어진다.

그럼 보통 아들에게 대통이 이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조카에게로 튄다.

그후에도 여러 명이 있는데, 모두 양씨다.

영춘의 남편 성씨로 대통이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전국적인 강자로 소문난 최초의 영춘권 사부는 양찬이다.

그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무술가들의 도전을 모두 받았고, 백전백승했다.

'불산찬선생' '남해권왕' 이란 별명을 얻었다.

 

양찬은 아들 양벽과 제자 진화순에게 권법을 전수했다.

엽문은 두 사람에게 모두 배웠다. 

 

긴 계보를 이야기했는데, 엽문4의 중추절 액션이 흥미로운 건, 

엽문이 여자 사부가 맞는 걸 보고 분기탱천한다는 설정이다.

이건 영춘권의 유래를 알고 있는 중국 사람들에겐 깊이 공감되는 설정이다.

 

엽위신 감독은 이런 부분을 참 잘 디자인한다.

 

★ 4편은 엽문의 말년을 다룬다.

그가 인후암에 걸려 사망할 때까지의 시기다.

미국 해병대의 교관 2명을 차례로 작살내는 것이 하일라이트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태극권 고수와 결투였다. 그야말로 권법 고수들의 일대일을 잘 묘사했다.

이 장면 하나를 열흘 동안 촬영했다고 하는데, 충분히 들인 공이 잘 느껴졌다.

동작 하나하나가 아름다웠고, 두 배우의 합이 좋았다.

태극권과 붙으니까, 더욱 느껴지지만, 영춘권은 확실히 치장이 덜하고 담백하다.

품새가 실전에서도 써먹을 만하다고 보여진다.

태극권 고수가 엽문이 팔을 다친 것을 눈치채고, 한 손 대결로 바꾸는 것도 멋있었고,

한 손 대결 장면의 안무도 정말 천하의 원화평다운 좋은 연출이었다.

 

★ 그렇다면 엽문의 실제 인생은 어떤 것일까?

여기저기 중문 사이트들을 뒤적여본 결과를 기록해둔다.

 

가장 알고싶었던 건, 1편의 일본군 박살내기 장면이 실제 있었는가?

소문과 증언이 갈린다.

소문은 있었다이고, 엽문의 아들의 증언은 없었다이다. 

 

소문부터 보자.

일본군이 불산을 점령한 건 1938년.

그때 엽문은 불산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가였고, 권총을 가진 사복경찰과 싸움이 붙었을 때, 손가락만으로 경찰을 제압한 일이 화제가 된 고수였다. 

 

일본군은 엽문을 무술 교관으로 초빙했으나, 그는 단칼에 거절한다.

왜 엽문을 교관으로 초빙했을까?

아마 점령군의 선전, 선동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초빙이 좌절되자 일본군은 군내 고수들을 보내 엽문과 대련하게 한다.

 

여기서 신화가 된 장면이 나온다.

일본군은 완전무장한 군인들로 대련장을 둘러싼 후,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대련을 실시한다.

엽문은 몇차례나 싸워야했는데, 여기서 기록이 갈린다.

모든 대련에서 상대를 처절하게 박살냈다는 기록도 있고,

상대의 균형을 뺏는 선에서 멈추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일까?

 

후에 엽문의 아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진실한 역사에서 부친은 일본인과 접촉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서양인을 이긴 것도 사실이 아니다. 

부친은 생전에 항상 가능하면 무력으로 상대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

 

모두가 기대하던 증언은 아니다.

여력이 된다면 일본군 기록을 뒤져보고 싶다.

하지만 이 시기 엽문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은 분명하다.

주변 사람들이 엽문을 찾아가 온갖 주문을 했다고 한다.

 

괜한 고집 피우지말고 져줘라.

자네가 이기면 고향 사람들은 더 괴롭다. 한번 져주라.

안에 들어가서 싸워라. 일본군에 협력하는 척 하고, 실제론 우리를 도우면 되지않나?

 

엽문은 결국 도망친다.

멀리 가진 않았다고 하지만, 그건 중국 사람들 기준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의 거리보다 먼 곳으로 피신한다.

그는 작은 가게를 열어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무술을 가르쳤다.

그렇게 항일전쟁 시기를 보낸다.

 

★ 엽문의 가난

일본군 작살내기의 진실을 뒤져보면, 이렇듯 주장이 갈리지만, 한가지는 공통된다.

거의 모든 기록이 엽문이 가난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4편이나 진행되는 내내, 가난의 분위기는 그의 주변을 맴돈다.

 

그런데 엽문은 언제 홍콩으로 간 것일까?

항일전쟁의 곤란한 상황에서도 떠나지 않으려 했던 고향을 왜 떠난 것일까?

 

그건 엽문이란 무술가가 비교적 늦게 영화로 만들어진 것과도 연결된다.

엽문은 국민당 경찰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항일전쟁이 끝나고 엽문은 국민당에 들어가고, 경찰을 한다.

형사부에서 일하면서 강도도 때려잡았다고 한다.

웬지 강도가 불쌍해지는 느낌은 뭔가?

 

이건 추측이지만, 이 때의 경력 때문에 그는 다시는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국공 내전이 끝난 중국 대륙은 공산당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1949년 엽문은 가족을 이끌고 홍콩으로 이주한다.

그 이후의 혼란한 대륙 상황을 보면, 고향에 남아있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홍콩에서 엽문을 후원해준 사람은 홍콩 호텔 공회 회장, '양상'이란 분이다.

엽문의 인생에는 '양'씨들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모두들 대들보 양 자를 쓴다.

창시자 영춘의 남편 성씨이다.

호텔 협회 회장이란 양상 이란 분도 이 집안 사람인가 궁금하다.

 

엽문은 1972년에 죽을 때까지 홍콩에서 살았다. 

22년 동안 열심히 무술을 가르쳤고, 많은 제자를 두었다.

영화계로 진출한 제자들도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건 이소룡이지만, 이번에 조사하면서 깜짝 놀란 발견은 적룡(狄龍)이었다. '영웅본색'의 맏형이 엽문의 제자였다. 

 

다시는 고향으로 갈 수 없던 실향민이지만, 이 실향의 세월은 엽문에게 사후 불멸의 이름을 주었다.

홍콩 영화인들은 이 조용하고 담백했던 무술 사범을 그리워했고, 

국민당 경력 때문에 대륙에서 전혀 다루지 않을 때도, 그를 조심스레 추억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가 되자, 항일 시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엽문의 전기영화를 만들어, 대륙에 보냈다.

 

왕가위의 '일대종사'(2013년)는 많이 늦게 발표되었지만, 기획은 엽위신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스탭들이 동시에 전기영화를 만든 것이다.

양조위와 견자단이 각각 연기하면서.

왕가위의 영화는 엽문 개인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그 시절의 무술가들을 다룬다.

이제 그 효용이 사라져가는 무술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들의 쓸쓸한, 하지만 자부심넘치는 인생을 그린다. 충분히 의미있는 시선이지만, 좀 빨리 만들지 하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 그 밖의 엽문 인생의 특이점

엽문(葉問, Ip Man, 1893-1972)의 본명은 엽계문(葉繼問)이다. 

광동 불산의 부잣집 아들이다. 집안에서는 둘째이다. 

그는 불산의 복현로 상원(桑園)에 거주했는데, 부지도 넓고, 집이 여러 거리에 걸쳐 있다. 

 

불산은 청나라때 영남일대의 무학중심이었고, 홍권(洪拳)의 명인 황비홍(黃飛鴻), 영춘권의 명가 양찬(梁贊), 철혈포두 풍소청(馮小淸)등이 모두 불산출신이다. 

 

엽문은 7살때부터 영춘권의 양찬의 제자인 진화순(陳華順)을 스승으로 모시고 영춘권을 배운다. 당시 진화순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이 어린 제자를 아주 아꼈다. 엽문이 13살때, 진화순이 사망한다. 엽문은 진화순의 제자 중 으뜸인 오종순에게 3년 더 배운다. 

 

16세가 되던 해, 그는 홍콩으로 공부하러 간다.

이 학교는 서양의 학제를 본따 만든 근대적인 학교이다.

엽문을 이 학교로 보낸 걸 보면, 엽문을 길렀던 어른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아무리 무술의 고장, 광동 불산의 어른들이지만, 아이에게 혹독한 무술 수업을 시키는 동시에, 대도시로 보내 서양 학문을 가르친 것이다. 재밌는 분들이다. 

엽문은 이 학교에서 영어도 배우고 서양의 과학도 익힌다. 

십대에 접한 서양학문과 언어는 엽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준다.

그는 더 넓은 세계를 아는 사람이 되었고, 엽문 영화 시리즈에서도 제자 이소룡의 무술 대중화를 응원하는 모습이 태어날 수 있었다. 실제 그는 많은 제자들이 영화계에서 일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본인도 죽기 전에 자신의 시범동작을 촬영하도록 부탁했다. 

 

한편 이때 홍콩의 학교에서 엽문은 길거리 싸움도 열심히 연마한다. 

당시는 청나라말기여서, 중국인들은 "동아병부(東亞病夫)"라고 불릴 때였다. 

학교에서 영국, 미국학생들은 자주 중국학생을 못살게 굴었다. 

엽문은 키가 작았고(1미터63센티미터) 곱상하게 생겨서, 더더욱 그들이 괴롭히는 대상이 되었다. 

엽문은 여러 학생들의 도전을 받았으나, 모두 이긴다.

이 길거리 싸움의 연승으로 그는 홍콩에 알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그를 찾아와서 대련을 신청한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응해준다. 그러나, 이때 그는 온갖 재주를 다 펼쳤지만, 모두 그 노인에 의하여 가볍게 모두 파해되었다. 그리고 엽문은 상대방의 초식이 무엇인지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엽문은 기가 죽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때 노인은 입을 열어 물어본다. 

 

"네가 진화순의 제자이냐?" 

 

엽문은 깜짝 놀랐다. 노인이 말한다: 

 

"내가 양벽이다" 

 

엽문은 그제서야 꿈에서 깨어난 것같았다. 그가 바로 영춘권의 일대종사, 남해권왕 '양찬'의 아들로서 사람들이 "벽선생(壁先生)"이라고 부르던 양벽이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엽문은 홍콩에서 사숙인 양벽을 따라 계속 영춘권을 익힌다. 

 

결국 엽문은 양찬의 두 제자, 양벽과 진화순에게 모두 사사한 제자가 된 것이다. 


1913년, 20세가 된 엽문은 양벽을 떠나서 불산으로 돌아가 가업을 승계한다. 

그는 자주 불산 일대의 무술가들과 교류한다. 영춘권도 점차 화경(化境)에 든다. 
엽문은 이때 계속 현대과학지식을 습득하여 역학원리, 기하각도등으로 권법을 새롭게 해석했다. 

 

엽문의 친구, 이제 이 아저씨도 못 보게 되었다. 좋은 연기였다.

 

★ 이소룡 이야기

제자 이소룡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소룡은 처음 엽문의 소문을 듣고, 도장을 찾아와 대련을 청했고, 황돈량이 대적했다. 이소룡은 패하였고, 도장에 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재미없는 기마자세와 단식수련만 들입다 가르치자, 이소룡은 1주일만에 도망친다. 인사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름 후에 이소룡이 다시 돌아온다. 황돈량이 왜 왔냐고 물어보니, 며칠 전에 거리에서 어떤 놈하고 싸움을 했는데, 처음에 아찔하게 많이 맞았다. 그러던 중, 여기서 배운 영춘권의 동작이 하나 생각나서 테스트했는데, 이게 먹혀서 이겼다.

 

이소룡은 영춘권의 실전 싸움의 가능성을 깨닫고, 이후론 단 한번도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소룡의 집념은 무서운 것이어서, 그는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주먹을 휘두르며 동작을 연습했다고. 길가는 사람들이 미친 놈 보듯 했다고 한다. 

 

이소룡은 미국으로 가서도 계속 쿵후를 연마했다. 의문이 있으면 국제전화를 걸어 엽문에게 물어보았다. 

영화 '엽문 4'편에는 국제전화가 자주 나오는데, 그건 이런 일화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 엽문은 평소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자신도 자신의 말재주가 없음을 인정했다고.

만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몇마디 하라고 하면 그는 항상 입이 마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무술수련 외에 취미라면, 엽문은 제자들과 차루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이외에 마작을 놀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귀뚜라미싸움을 즐기기도 했다.

광동의 귀뚜라미는 아주 용맹하고 싸움을 잘한다.

두 귀뚜라미는 수십회합을 싸우고, 어떤 귀뚜라미는 다리가 부러져도 여전히 용맹하게 싸운다.

개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그의 취미중 하나였다. 엽문은 개싸움을 볼 때, 다른 무술고수 한사람과 함께 갔다.

 

★ 한편 영화를 보는데, 가장 먼저 좋았던 건 음악이었다.

북소리와 합창단의 허밍이 살살 들어가면서, 기본 멜로디가 서정적이면서 어딘가 비극적인.

그것은 카와이 켄지의 세계이다.

공각기동대와 칠검의 음악을 만든 천재 음악가.

엽문 시리즈에도 참여해 정말 좋은 스코어를 만들었다.

 

★ 청말에 태어나 격동의 시간을 살아간 무술가, 엽문.

견자단은 너무나 좋은 연기로 잊지못할 영화를 4편이나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우리는 엽문, 황비홍 처럼, 견자단이란 영화를 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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