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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Movie

베이루트:리미티드 아워, 존 햄과 로자먼드 파이크의 국제첩보전

by 헤로도토스의 별 2024. 12. 9.

협상가 메이슨, 존 햄 연기

 

1. 실화가 아니었네?

이 영화는 좀 이상한 형태로 시청했다. 

모름지기 영화란 차분하게 앉아서 영화사 로고부터 시청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 영화는 케이블 TV에서 틀어주는 것을 우연히 접하고 그대로 붙들려서 시청했다.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모른 채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보니 앞 부분 15분 정도를 놓쳤었다. 그래서 주인공의 중요한 과거사와 주요 등장인물의 관계를 모른 채 영화를 보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들이 발생했다. 저 양반은 왜 저렇게 인질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누가 죽은건가? 주변 사람들이 정말 현실적인데, 다들 악당으로 보이는구만. 다 시청한 뒤에 IMDB에 가서 영화에 대한 정보를 꼼꼼히 읽은 뒤에도 바로 영화의 앞부분을 찾아 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뒤, 영화를 찾아서 앞부분 15분을 보았다.  요즘에는 영화들이 수돗물처럼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시청하는 영화들이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공부하는 차원에서는 이런 식으로 시청하는 것도 뜻하지 않는 이로움이 있는 것 같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뒤, 정보를 찾아보고 가장 놀란 것은 이 영화가 실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실화인 줄 알고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에 나온 것들은 모두 허구였다. 

 

처음에 영화를 볼 때는 아, 저것이 베이루트에서 CIA 요원이 납치되어 살해당했던 사건의 진상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1984년. 베이루트에서 CIA  요원 윌리엄 버클리가 이슬람 과격단체에게 납치되어 살해되었다.

그 한 해전에는 베이루트의 미대사관이 폭탄테러를 당해 무려 63명이 사망했다. 

대사관 건물이 반파되어 주저앉은 사진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이 영화가 그 사건들의 진상을 알려주는 이야기인 줄 착각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사건관계자들이 쓴 회고록 같은 것이 출판되었고, 그걸 기반으로 만든 줄 알았다. 

 

이게 다 영화를 처음부터 보지않은 탓이다.

실화 영화들은 보통 처음 자막에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표시한다.

조금 허구가 많이 들어가면, 실화에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에 그런 자막이 없다. 

다 뻥이기 때문이다.

 

작가 토니 길로이는 실제 중동외교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연구하여, 시간을 재배치하고, 인물을 몽타쥬하여 허구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영화 속 시간은 1982년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내용을 사실이라 치면,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도 미국은 그 다음해 CIA 요원이 다시 납치되어 살해당했고, 대사관이 테러공격을 당하는 것이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실제로 역사에서 미국 외교에 벌어진 참담한 사건들을 설명하려는 것일까? 

왜 미국이 중동에서 조정자 역할에 실패했는지 알려주마.

그것이 영화의 목적일까?

 

총보다 말이 강하다고 믿는 사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현대 중동에서 벌어지는 혼란의 원인을 소통부족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메이슨은 실패할 운명이었나?

 

 

존 햄, 영화의 클라이맥스, 마지막 협상장면에서도 그는 총이 아닌 혀로 해결한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있구나 싶다.

현대사를 다룰 때, 실화가 아니라, 작가의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여 허구를 만드는 것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보면 이런 경우, 룰이 있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허구의 인물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가 실화가 아니라 허구라는 사실을 알게된 이후, 좀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기당한 느낌까지는 아니어도 좀 찝찝한 것이 남았다. 

 

벤 에플릭의 <아르고>와 여러가지로 비교된다.

두 영화는 같은 중동이 배경이고, 급진단체들을 상대하는 외교 첩보전이며, 총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해결을 시도한다.

아르고는 캐릭터들이 벌이는 스토리에 긴장을 하면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어쨌든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온전히 작가 토니가 허구로 구성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얼마나 사실이 있는 것일까?

진짜 베이루트에서 미국인은 어떤 경험을 한 것일까?

 

IMDB에는 이 영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평이 주르륵 달려있다.

그 중에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평이 있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시간 동안 저는 베이루트 주재 미국 대사관에 주둔한 미국 해병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거의 모든 것이 원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내전 중 베이루트는 미친 채 돌아가는 장소였고, 제가 군생활하면서 경험한 것들이 반영되기를 기대했기에 영화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이 평을 쓴 유저는 영화에 1점을 주었다. (10점 만점)

 

이런 생각도 든다. 

토니 길로이가 이 영화에서 전하는 메세지, 총보다 말이 중요하다는 믿음.

그것은 정론처럼 들린다.

하지만 어쩌면 격동하는 세계에서 이런 나약한 생각이야말로 혼란을 부르는 것은 아닐까.

 

아무런 죄없는 일반시민들을 죽고 죽이는 갈등의 전쟁터에서, 말보다는 총이 중요하다. 

총을 준비하지 않으면 말도 힘을 잃는다. 

 

2. 본 시리즈의 작가, 토니 길로이

 

각본가 토니 길로이는 무려 제이슨 본 시리즈의 작가이다.

무적의 첩보요원 제이슨 본이 현실감이 철철 넘치는 캐릭터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온전히 각본의 힘이다. 

그는 비현실적인 첩보요원의 발을 땅바닥에 착 달라붙게 만들었고, 매력적인 인간으로 공감하게 만들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제이슨 본은 미션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두 캐릭터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건 각본의 힘이 컸다.

 

이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본이 가진 무력이 없다. 존 햄이 연기한 메이슨의 무기는 혀이다.

그는 전직 외교관 출신의 협상가이다.

영화에서 그는 총을 쏘지도 않는다. 총을 든 자들 앞에서도 바쁘게 혀를 놀릴 뿐이다. 

클라이맥스에서조차 그는 총을 잡지않는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영화의 초기 제목이 협상가였다고 하는데, 이해가 된다.

제작진은 후에 개봉할 때, 제목에서 주인공의 정체성을 버리고, 그가 싸운 장소를 선택했다. 

베이루트.

그리고 한국에서는 도시 이름 뒤에 리미티드 아워 라는 부제를 덧붙였다. 

 

하여튼, 토니 길로이는 좋아하는 작가여서, 그가 참여한 작품은 모두 시청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놓쳤었다.

본 시리즈의 작가가 참여한 작품인데 왜 이렇게 유명세가 없을까?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니 이해는 됐다.

토니 길로이는 이 작품을 쓰기 전에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들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세계를 좋아해서 르 카레 풍의 첩보전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다만, 토니가 르 카레의 작품세계에 대해 남긴 말에선 비판적인 것들이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그의 책은 대단했지만, 요약하기 너무 어려워서 항상 좋은 영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2시간 분량의 프레임에 넣을 수 있는 르 카레 유형의 영화를 디자인한다는 생각에 큰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캐릭터가 큰 실망에 직면한다는 아이디어는 르 카레의 특징입니다."

 

토니는 90년대 초반에 각본을 완성했는데, 팔리지 않았다.

중동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 세력의 이해관계가 달려있었고, 어느 쪽 편을 들지않는 영화는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렀고, 벤 에플릭의 <아르고>가 아카데미상을 받고, 흥행을 했다. 그러자 돈이 되겠다싶은 사람들이 다시 달라붙어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3 기억에 남는 것

영화 속에서 PLO과격파에게 납치된 요원은 미대사관 내부 정치의 희생자이다.

그는 대사관 간부들이 400만불을 횡령한 것을 알아내고 고발할 준비를 하다가, 역공을 당한다.

스토리에서 진짜 숨어있는 악당은 바로 미대사관 간부들인 것이다.

그들이 주인공 메이슨을 인질 협상가로 선택한 것은, 일을 잘못 되게 만들었을 때, 책임질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주인공의 일은 실패할 운명을 가지고 디자인된 것이다.

 

메이슨의 반격은 여기서 굉장히 멋졌다. 

그는 직원들이 횡령한 400만불을 찾아낸 뒤, 그 돈을 납치법들과 협상에서 협상금으로 사용한다.

돈에 미쳐있는 자를 괴롭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이다.

 

4. 존 햄

알콜중독자, 존 햄

 

주연배우 존 햄은 이 작품의 주연을 맡고 기뻤던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사려깊은 스릴러를 발견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큰 정치적 주제는 더 이상 영화에서 자주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액션 요소나 만화책 요소가 있는 영화가 아니라, 중요한 것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게 되어 기뻤습니다. 

메이슨은 단순한 터미네이터가 아니라 소통가입니다. 마법 망치를 던지거나 주문을 걸거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일을 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메이슨의 재능은 직접적이거나 교활한 방식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고,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 다 무언가를 내놓고 이상적으로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조금씩 얻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지금은 너무 양극화되어서 당에 대한 반역자, 국가에 대한 반역자, 종교에 대한 반역자가 될까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흑백으로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은 그런 색 구성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싸우고, 그것은 무언가를 전진시키는 매우 합법적인 방법인 것 같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얻기를 바라는 메시지는 바로 싸우는 대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존 햄은 좋은 작품들을 많이 했지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를 갈구는 해군간부 역할이다. 

매버릭에서 그는 군대 관료주의의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그의 깔끔하게 생긴 외모는 관료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국적과 종파에 상관없이 여러 사람을 초대하는 파티를 여는 외교관 역할에 그는 잘 어울린다.

문제는 그가 일탈했을 경우이다.

메이슨은 아내가 사망하는 큰 사고를 경험한 뒤, 외교관을 그만두고 알콜중독자로 살아간다. 

그는 노사간의 협상을 주재하는 협상가이지만, 노상 술에 취해있다. 

존 햄은 이런 파괴된 주인공의 모습을 연기할 때, 좀 아쉽다.

사람마다 고통에 반응하는 형태는 다르지만, <맨 온 파이어>에서 덴젤 워싱턴의 연기가 생각할 때, 존 햄의 연기는 너무 절제되었다. 

 

연기는 참 어렵다. 

 

5. 정교한데 즉흥성이 살아있는 촬영

영화는 불과 33일만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처음 몇 초만 보고 시선을 뺏긴 것은 화면 땟깔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의상과 소품이 다양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평범한 공간도 그 공간감이 풍부했다. 

세트보다 야외촬영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저런 완벽한 통제를 할 수 있을까?

정말 경탄스럽다.

 

주인공의 활동 공간인 베이루트는 폐허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큰 상처를 입은 주인공의 내면으로도 보여져서 잘 어울렸다. 

 

기술적인 완성도가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미술관에 가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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