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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Drama

항공사고 수사대 스페셜ㅣ1958년 맨유 뮌헨 비행기 참사ㅣ누명과 싸운 기장

by 헤로도토스의 별 2021. 1. 30.

★ 새로 알게된 사실이 가장 마음이 아팠다.

뮌헨참사의 비행기는 사고가 나기 전, 2번이나 비행을 멈출 기회가 있었다.

활주로를 따라 달리다가 엔진 이상으로 그만 두는 걸 2번이나 했던 것이다.

내가 비행기 안에 타고있었다면 오싹 했을 것 같다.

어찌보면 2번이나 위험한 비행을 멈추라는 신호가 있었는데도, 사고는 일어났다.

비행기는 왜 3번째 이륙을 시도해야만 했을까?

 

그동안 한국 위키의 설명 때문에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항공사고 수사대는 당시 상황과 사고정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사고현장

★ 1958년의 뮌헨 참사는 많이 알려졌다.

지금도 2월 6일에 경기가 벌어지면 애도하는 의식을 가진다.

퍼거슨 이전 맨유의 전성기를 열었던 또 한명의 스코틀랜드인 맷 버스비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우선 항공사고 수사대다운 디테일한 기술적 문제부터 보자.

사고원인은 무엇인가?

 

한국어 위키는 사고 유형을 연료부족, 사고 원인을 조종사 과실로 적어놓았다.

하지만 항공수사대를 보니, 전혀 아니었다.

또한 영문 위키는 항공수사대의 결과와 동일하게 원인을 기술해놓았다.

 

사고 원인 : 활주로의 슬러시 때문에 이륙실패.

 

즉, 공항의 실수라는 이야기다.

왜 한국어 위키는 이 모양일까?

검색을 해보니, 나름 이유는 있었다.

 

사고가 벌어진 곳은 뮌헨. 

독일은 몇몇 결정적인 증언을 뭉개고, 조종사의 부주의한 이륙시도로 사고가 났다고 결론내었다.

이에 영국인 기장은 끈질기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사고 후, 10년 동안 독일 조사단의 사고원인발표는 공식 문건이 되었고,

영국인 기장은 대중으로부터 욕을 들어먹고, 직장에서도 쫒겨났다.

 

제임스 테인, 영국인 파일럿은 양계장을 하면서 살아가면서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았으나, 나중에 조심스레 독자 조사를 시작.

테인의 말이 옳았다는 걸 증명한다.

 

활주로에 눈이 내려 쌓인 것이 녹으면서 슬러시처럼 걸쭉해지고, 그게 비행기가 이륙시에 애써 얻은 이륙 속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슬러시에 미끌어지며 추진력을 잃은 비행기는 공중으로 뜰 수가 없었다.

결국 공항 라인을 벗어나 근처의 민가에 충돌, 하필이면 이때 민가에 휘발유가 가득 담긴 트랙터가 있었다.

그것과 충돌하며 폭발한 것이다.

 

영국인 파일럿의 잘못이 편했던 독일 측의 미진한 조사는 큰 후유증을 남겼다.

제임스 테인은 10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았다.

 

제임스 테인 기장

 

★ 그렇다면 더 깊은 원인으로 들어가보자

왜 이 비행기는 그렇게 다급하게 맨체스터로 돌아가야 했는가?

 

영국 축구협회의 규정 때문이다.

당시 맨유의 멧 버스비 감독은 영국 축구협회와 대립하고 있었다.

멧 버스비는 유럽의 다른 축구 클럽들과 교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축구협회는 축구의 종주국 자존심을 내세우며 굳이 자국리그를 희생해가면서 유럽 대항전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협회는 그 전에 리그 우승팀인 맨시티의 유럽대항전 참가를 막았고, 맨시티는 그에 따랐다. 

반면 멧 버스비는 협회에 저항했고, 유럽대항전에 참가를 결정했다.

당시 영국 리그는 주말에 열리고, 유럽대항전은 주중에 열렸다.

멧 버스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지는 4강전을 위해서 리그경기 연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오히려 영국 협회는 멧 버스비에게 만약 주말 경기에 정시에 경기장에 나오지 않으면 몰수패를 선언하겠다고 협박했다.

 

유고에서 열린 대항전에서 승리한 맨유는 주말 리그 경기를 위해서 빨리 돌아와야했다.

지금의 비행기라면 큰 문제가 되지않는다.

극동아시아의 선수들도 유럽과 고향을 왔다갔다한다.

하지만 당시는 1958년.

유고에서 맨체스터까지 직항항로가 없었고, 맨유 선수단이 탄 비행기는 그 거리를 감당할 연료를 실을 수 없는 기종이었다. 그래서 중간기착지, 뮌헨이 필요했던 것이다. 

 

 

뮌헨 참사 이후 맨유의 재건은 어려운 일이었다.

진지하게 팀 해체도 논의되었다고 한다.

주전 중 8명이 죽고, 2명이 부상으로 영구히 선수생활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스탭들도 온전하지 않았다.

멧 버스비 본인도 병원에 2달이나 입원했을 정도로 중상이었다.

 

멧 버스비 본인이 다시 팀 재건을 목표로 삼고 뛴 건, 아내의 조언이 컸다고 알려져있다.

이번에 검색하다 알게된 건, 당대의 유럽 축구 거인들의 움직임이다.

 

일단 멧 버스비 감독이 실현하려 했던 영국과 유럽의 축구 교류는 시대의 사명이 되었다.

사람들을 이 이상 아래 모이게 했다.

 

당대 유럽 최강팀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회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맨유의 재건을 돕기로 마음먹고, 

소속팀의 주축선수 2명을 맨유로 보내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그 선수들이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었다.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

푸스카스는 얼마전 손흥민이 받은 푸스카스상의 그 푸스카스이다.

디 스테파노야 설명이 필요없는 천재 선수이고.

 

하지만 이 제안은 영국협회로부터 거절당한다.

당시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 선수는 영국 리그에서 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지금의 유럽 축구 시스템은 어느날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오류와 아픔을 경험하면서 천천히 만들어진 것이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

또, 맨시티 관련 일화도 하나 있었다.

유럽축구협회가 맨유의 사고 이후, 유럽대항전 참가권을 맨유 대신 같은 도시에 있는 맨시티에게 주겠다고 제의했다.

맨시티는 회의를 열었고, 결론을 내렸다. 

 

싫다! 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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